콘탁스와 짜이스 렌즈
1846-1890
칼 자이스가 세워진 예나(jena)의 살레(Salle)강은 언제나처럼 흐르고 있다. 예나는 살레 강처럼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담고 있는 마을이다.
1846년, 예나 대학교의 연구소를 위해 자이스가 그의 확대경 공작소를 설립한 곳이 바로 예나이다. 칼 자이스의 허름한 시작은 뒤이어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정밀한 광학 회사로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칼 자이스는 1816년 9월 11일 바이마르에서 태어났다. 학업을 마친 후 당시 망원경에 쓰이는 렌즈를 연구하고 있던 프레드릭 쾨너(Frederick Koener)박사 밑에서 도제 생활을 마친 뒤에 예나 대학에서 광학관련 과목을 청강하게 된다. 예나 대학에서 자이스는 렌즈 제작에 관련된 이론을 배우게 된다. 나중에 자이스는 슈투트가르트,다름스타드트,빈,베를린에 있는 유리,렌즈 제작자들을 찾아다는 7년간의 여행을 거치게된다. 이 과정을 거치며 그는 유리 용해와 성분, 결정온도 등에 대한 데이터를 확보하게 된다.
1846년 칼 자이스나 30세가 됐을 때, 그는 예나 입구에 있는 뉴가스(Neugasse)에서 그의 첫 작업실을 열게 된다. 자이스의 첫번째 제품은 20여명의 근로자들에 의해서 생산된 확대경과 간단한 현미경이었다. 복합 현미경의 생산을 시작한 것은 1858년이었다. 칼 자이스는 질 좋은 제품으로 명성을 얻었고 1861년에는 튀링 지방 박람회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칼 자이스의 모든 작업은 철저하게 시행착오에 바탕을 둔 실증 연구에 바탕을 두었다. 이런 연구방법은 명백히 엄청난 시간과 노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자이스는 과학적인 접근이 좀더 정확하고,경제적인 생산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몇 차례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1866년 자이스는 예나 대학의 강사였던 에른스트 아베(Ernst Abbe)를 만나게 된다.
에른스트 칼 아베는 1840년 아이젠나흐에서 태허았다. 아베는 21살에 괴팅겐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1863년 예나 대학에 들어가서 1870년 물리학과 화학과 교수가 되었고 1878년 천문/기상 관측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아베는 1866년에 자이스의 작업실에 합류하였다. 1872년 새로운 종류의 광학 렌즈를 만들기 위한 6년간의 노력 끝에, 아베와 그의 연구진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품질의 복합 현미경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 현미경은 오늘날 쓰이고 있는 모든 복합 현미경의 모태이기도 하다.
복합 현미경이 개발된 1년뒤, 1873년 아베는 그의 발명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다. 광학 설계에 있어서 최초로 수차(收差)와 회절 그리고 코마에 대한 연구가 도입되고 이해된 것이다. 칼 자이스는 아베의 노력에 대한 대가로 1876년 아베를 공동 경영자로 임명한다.
오늘날의 칼 자이스를 있게 한 초창기 세번째 멤버는 1879년 아베에 의해 칼 자이스로 초대되었다. 프레드릭 오토 쇼트(Freidrick Otto Schott)는 광학 유리에 리튬을 사용하는 연구를 진행하였고 그 과정을 설명한 편지를 아베에 보낸다. 아베는 즉시 흥미를 느끼게 되고 쇼트의 연구에 칭송을 마지 않는다. 두 사람은 그 이후 평생에 걸친 유대를 갖게 된다. 쇼트 1884년 칼 자이스 현미경에 쓰이는 특출난 렌즈를 개발하고 이후 이 렌즈를 생산하는 공장은 칼 자이스, 에른스트 아베, 프레드릭 오토 쇼트에 의해 공동 소유된다. 쇼는 이후 100여개 넘는 종류의 광학 렌즈를 개발하고 예나 지방은 세계 가장 유명한 렌즈 생산지가 된다.
에른스트 아베는 다양한 취미를 갖고 있었고 그 중 하나는 사회 발전이 만들어 내는 영향이었다. 1888년 칼 자이스가 죽고 그의 재산은 그의 아들인 로드릭에게 상속된다. 젊은 로드릭 자이스는 1년 뒤 에른스트 아베에게 모든 지분을 넘긴다. 아베는 이후 칼 자이스 재단을 세우고 예나 대학에 칼 자이스 재산의 상당 부분을 기증하여 명성을 쌓게 된다. 이후 고용자들에게 칼 자이스의 부동산을 불하하는 등, 19세기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인도적인 활동을 벌이게 된다.
아베는 논의의 여지가 없는 천재였다.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감사하게도 그의 인생 대부분을 광학과 사진에 바쳤다. 아베는 렌즈의 유효구경이 감소할 때 해상력이 떨어지는 이유를 밝혀냈다. 오늘날 우리는 그 현상이 회절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는 특수한 광학 공식과 계측 기술을 합쳐 구면 수차가 없는 렌즈를 만드는 방법을 밝혀냈다. 또 회절 현상의 일종인 코마를 설명했다. 오늘날 코마의 보정은 아베의 싸인 법칙의 적용으로 이뤄진다. 더 나아가 아베는 렌즈 설계에 있어서 색수차 보정을 위해 형석(螢石)을 도입하였다. 색수차를 없애기 위한 연구의 축적은 아포-크로마틱 렌즈의 개발로 이어졌다. 아베는 오늘날 광량을 계산할 때 쓰이는 노출 수치 계산 체계를 개발하기도 했다.
1980년 칼 자이스 재단은 카메라 렌즈를 연구/개발하기 시작한다. 광학계 수학자였던 폴 루돌프는 칼 자이스 최초의 카메라 렌즈인 프로타르(Protar)를 개발한다. 프로타르는 비점수차(넓은 뜻의 구면수차의 5종류 중의 하나로서, 주축에서 떨어져 있는 물점(物點)의 상(像)이 완전한 점이 되지 않고 고리 모양 또는 방사상(放射狀)으로 흐릿해지는 현상이다.)를 제거하고 시야의 왜곡을 없앤 렌즈였다.
1891-1945
1896년 루돌프는 오늘날 까지도 그 섬뜩한 정확도로 유명한, 전설적인 플라나르(Planar) 렌즈를 개발한다. 플라나라는 콘탁스 SLR, G시리즈, 핫셀블라드 중형 카메라 등에 쓰이고 있다. 플라나르는 광학 대칭 설정을 통해 구면수차와 비점수차를 완벽히 제거했다. 플라나르는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되고 있는 렌즈 공법 중의 하나이다.
세기가 바뀌고 1901년 세계는 칼 자이스 제단의 로(M. Von Rohr)가 개발한 최초의 비구면 렌즈를 경험하게 된다. 이후 칼 자이스 테사(Tessa)렌즈가1902년 루돌프의 계산법의 적용으로 태어나게 된다. '독수리의 눈'으로 알려져 있는 테사 렌즈는 높은 해상력과 컨트라스트로 유명하였다. 테사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숫자 4를 의미하며, 이 렌즈는 비교적 단순한 네 개의 렌즈로 구성되어 있었다. 테사 렌즈가 갖고 있는 설계의 단순함, 높은 컨트라스트 그리고 아주 적은 왜곡에 대한 명성은 아직도 유효하다.
1905년 1월 14일, 칼 자이스를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낸 에른스트 아베가 죽는다. 1919는 프레드릭 오토 쇼트는 자신이 갖고 있던 지분 전부를 칼 자이스 재단으로 넘기고 이제 모든 운용권을 재단이 갖게 된다. 1912년 안경렌즈 사업부문이 과학 기자재 사업부문과 함께 출범하면서 칼 자이스는 재단 거의 모든 광학 부문을 아우르는 라인업을 구축하게 된다.
1925년 라이쯔사에서 35미리 카메라 라이카를 소개하면서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키게 된다. 이 혁신적이고 작은 기기는 즉시 인기를 얻는다. 칼 자이스 재단은 라이카의 성공에 대응하여 Ica, Contessa-Nettel, Ernemann and Goerz 등의 작은 카메라 회사르르 인수/합병 하여 자이스 이콘(Zeiss Ikon AG)를 설립한다. 자이스 이콘은 많은 종류의 카메라를 생산하였으나 초창기 라이카의 적수는 될 수 없었다.
마침내 1932년, 자이스 이콘은 콘탁스(Contax) 카메라를 생산하기에 이른다. 라이쯔사는 오직 한 종류의 카메라(라이카)만을 생산했으나 자이스 이콘은 여러가지 제품들을 소개했었고 그 많은 제품들의 정점이 바로 콘탁스였다. 최초의 콘탁스는 오늘날 최고 수준의 레인지 파인더 카메라와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최초의 콘탁스는 셔터 스피드를 1/1000초 까지 조절할 수 있는 11개 날로 구성된 수직 포컬 플레인 셔터를 갖고 있었다.
콘탁스II는 1936년 부터 1945년까지 생산되었다. 콘탁스II는 1250분의 1초까지 셔터스피드를 지원하였고 셀프 타이머와 크롬 도금 바디를 갖고 있었다. 콘탁스II의 특징을 그대로 계승한 콘탁스III는 그해 함께 출시되었으며 카메라 상단부에 노출계를 내장하고 있었다.
1936년에서 37년 경에 칼 자이스의 엔지니어는 새로운 종류의 카메라를 연구하였다. 그것은 콘탁스II에 기반을 두고 거울을 삽입한 반사형 35미리 카메라였다. 처음의 설계는 뷰파인더에 투영되는 이미지는 너무 어두웠다. 이후 시도 보정 렌즈와 펜타프리즘이 삽입되었고 포커스링을 통해 촛점을 맞추는 형태가 도입되었다.
불행하게도 콘탁스 SLR카메라의 초기 원형들은 전쟁 중에 모두 소실되고 없다. 1945년 2월 14일 동맹국의 폭격이 드레스덴에 있는 카메라 공장을 파괴해 버린 것이다. 이 폭격은 칼 자이스 재단의 역사에서 어려운 시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패튼(Patton)의 전차군단이 예나와 칼 자이스 재단을 접수했다. 이 때까지 예나 공장은 보전되고 있었으나 얄타 회담 이후 독일이 분단되면서 예나와 드레스덴의 공장은 칼 자이스 재단의 대부분과 함께 동독으로 귀속돼 버렸다.
분단이 결정된 직후 미군들은 서독으로 복귀하면서 칼 자이스의 기술적인 중요성을 확인하고 126명의 핵심적인 기술자들과 운영진들이 서독으로 탈출하는 것을 도왔다. 이들은 서독 슈투트가르트의 콘테사에 새로운 공장을 설립하게 된다. 이들중에는 칼 자이스 재단 이사회의 전부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칼 자이스 재단의 전부는 서독으로 이전하게 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동안, 동독에서는 러시아인들이 94%에 달하는 칼 자이스 공장의 장비들을 전쟁배상금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수마일에 이르는 기차들이 6,7개월동안 소련으로 칼 자이스 공장의 장비들을 실어 날랐다고 한다. 이렇게 이전된 장비들은 소련에서 콘탁스와 자이스 이콘의 질 나쁜 복사판을 생산하던 키에프(Kiev) 카메라 설립의 기반이 되었다.
드레스덴과 예나에서 소련에 의해 벌어진 약탈에도 불구하고 전후 동족의 칼 자이스는 부활하였다. 칼 자이스 예나라고 불려진 일련의 카메라들을 생산하였고 이 카메라들은 전쟁배상금으로 소련에 의해 징발되었다. 또다른 칼 자이스의 역사사 시작된 것이다. 동독과 서독의 칼 자이스는 서로 다른 전략을 취했다. 서쪽의 칼 자이스가 과거의 레인지 파인더 카메라들을 현대화시키는데 주력한데 반해 동쪽의 칼 자이스는 SLR이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카메라를 개발하는데 노력했다.
1946-1960
1949년 라이프찌히 축제에서 동독의 칼 자이스 드레스덴은 콘탁스S라고 불린 펜타프리즘을 내장한 세계 최초의 35미리 일안 리플레스 카메라를 출시한다. 콘탁스S는 전쟁이전의 콘탁스SLR의 원형과 많이 닮아 있었다. 이것은 42미리 스크류 마운드를 통해 렌즈를 교환할 수도 있었다. 콘탁스S는 세로의 천 셔터를 채택했다는 점과 전체적인 사이즈가 줄었따는 점에서 다른 대개의 콘탁스카메라와 달랐다.
1952년 S의 후속모델로 콘탁스D가 출시됐다. D는 드레스덴을 상징하는 것으로 서쪽의 칼 자이스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S와 D의 차이점은 플래시 접점이 카메라 상단으로 이동했다는 것과 시끄러운 동작소리가 작아졌다는 것을 제외하고 차이는 거의 없었다. 이후, 독동 칼 자이스의 카메라는 펜타프리즘을 단 콘탁스라는 뜻의 PENTACON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한편 서독의 칼 자이스에서는 1950년 포토키나에서 콘탁스IIa를 내놓았고 일년뒤 IIa를 위한 16종류의 렌즈들을 출시했다.
** 당시 출시된 렌즈들 : Biogon 21mm f4.5 Biotar 75mm fl.5 Topogon 25mm f4.0 Sonnar 85mm f2.0 Biogon 35mm f2.8 Triotar 85mm f4.0 Biometar 35mm f2.8 Tessar 115mm f3.5 Planar 35mm f3.5 Sonnar 135mm f4.0 Sonnar 50mm fl.5 Sonnar 180mm f2.8 Sonnar 50mm f2.0 Sonnar 300mm f4.0 Tessar 50mm f3.5 500mm f8.0
1951년에는 콘탁스III를 계승한 콘탁스IIIa가 출시되었다. II와 III의 차이처럼 IIIa는 노출계를 내장했으며 이전 보다 훨씬 정확하고 넓은 범위의 측광이 가능하였다. 이후 서쪽의 칼 자이스는 1955년 매우 높은 성능의 SLR카메라이자 한편으로는 못생긴 모습으로 악명 높았던 콘탁렉스(Contarex)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콘타렉스는 셀레니움 노출계와 포컬 플레인 셔터를 갖고 잇었다. 플라나를 50미리 f2.0렌즈를 달면 콘타렉스는 1.2킬로그램이 넘었다. 콘타렉스는 최초로 필름백(Flim Back)을 교체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했다. 한 카메라로 여러가지 필름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피스에는 바늘이 달려 있어 노출 정도를 표시했다. 이 훌륭한 카메라는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같은 시기에 일본인들이 훨씬 값싼 Nikon F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1961-1975
1966년에 콘탁렉스 프로페셔널이 소개되었다. 하지만 이 모델은 가격을 낮추기 위해서 노출계가 내장되어 있지 않았다. 가격은 내려갔지만 편의성에서 니콘에 밀린 콘타렉스는 계속해서 실패를 거듭했고 1967에 내놓은 콘탁렉스 슈퍼에는 다시 노출계를 내장했으나 역시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자이스 이콘에서 만든 마지막 SLR카메라는 콘타렉스 SE이다. SE는 Super Electronic을 의미한다. SE는 수평 천셔터와 카메라에 옵션으로 부착될 수 있는 모터 드라이브를 갖고 있었다. SE의 색다른 특징 하나는 세계 최로로 조리개 우선 방식의 촬영을 가능케 하는 Tele Sensor였다.
독일제 콘탁스 카메라는 정교한 기술과 혁신적인 디자인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독일에서 더이상 콘탁스 카메라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했다. 일본의 저가공세로 인해 독일 카메라 산업은 절대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칼 자이스 재단이 찾은 해법은 야시카와의 합작이었다. 야시카의 전자식 카메라 기술에 메력을 느낀 자이스가 콘탁스 카메라 바디를 일본에서 생산토록하고 그 바디를 위한 렌즈들은 칼 자이스 이콘에서 생산한 것이다. 이런 형식의 합작은 후일 다른 독인 카메라 업체들에서도 사용되었다.
야시카는 광장한 전자식 카메라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는 업체였다. 이미 일렉트로 GSN이라고 불린 조리개 우선 방식의 카메라를 생산하고 있었다. 단 1회의 만남 이후 칼 자이스와 야시카 간의 계약이 체결되었고 "Top Secret Porject 130"이라고 불린 계약이 서명되었다.
직후 칼 자이스와 야시카의 합작에 세번째 파트너가 참여했는데, 이는 디자인은 담당한 포르쉐 그룹이었다. 칼 자이스의 광학 기술과 야시카의 전자 설계 기술, 그리고 포르쉐의 인체공학적 디자인인 결합된 것이다. 이들의 첫번째 결과물은 1974년 포토키나에 등장한 콘탁스 RTS로 불린 제품이었다. RTS는 조리개 우선 모드와 수동 모드를 갖고 있는 완전 전자식 카메라로서 초당 5장의 연사가 가능한 모터드라이브를 장착할 수 있었다. 2천분의 1초까지 지원되는 무단 셔터가 내장되어 있었고 세계 최초로 노출 보정 기능도 내장하고 있었다.
1976-1995
야시카는 1979년 RTS의 후계기종으로 더 작아진 Contax 139Q를 출시했다. Q는 무단 셔터와 마이크로-초 단위의 제어 시스템을 상징한다. TTL 플래시 측광도 139Q에 의해 최초로 소개되었다. 45미리 f2.8의 테사 렌즈가 함께 소개되어 세계에서 가장 작은 최고 품질의 SLR시스템을 구성하였다.
야시카에서 콘탁스 뱃지를 달고 세번째로 내놓은 카메라는 137MD, 모터드라이브를 내장한 세계에서 가장 작은 카메라였다. 137MD는 AE Lock버튼을 통해서만 셔터스피드를 조절할 수 있는 조리개 우선 모드만들 지원했다. 곧이어 137MA가 메뉴얼 모드와 초당 3장의 연사기능을 포함하여 137MD의 뒤를 이었다.
Contax RTS II가 1982년 뒤를 이었다. RTS의 전통적인 디자인을 계승하고 있었지만 내부 디자인이 전부 새로 이뤄진 모델이었다. TTL 플래시 측광과 무단셔터, 그리고 전자식 셀프 타이머가 내장되어 있었으며 티타늄 호일 셔터라는 신기술로 무장했다.
1985년에 나온 Contax 159MM 는 "up-graded"된 Contax 139Q이다. 최고 셔터 스피드가 1/4000에 이르고 플래시 싱크 속도는 1/250까지 가능했다. 더불어 159MM는 고속,저속,보통의 세 가지 프로그램 모드와 조리개 우선,메뉴얼 모드를 갖고 있었다. 159MM은 MM타임이라고 불린 새로운 형태의 칼 자이스 렌즈와 함께 출시되었다. MM타잎 렌즈는 159MM 이후의 카메라에서 프로그램 모드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MM타잎은 렌즈는 최소 조리개 수치가 초록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구별된다. MM렌즈의 다른 기술적인 특성은 카메라 바디에 MM렌즈임을 알려주는 Tab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MM렌즈의 진정한 특성은 카메라 바디가 프로그램 모드와 셔터 스피드 우선 모드에서 조리개 수치를 조절할 수 있도록 더 가벼운 조리개막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1987년 167MT가 라인업에 추가되었다. 167MT는 다중 모드와 3장 연사의 모터드라이브가 내장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세계 최초로 Automatic Bracketing Control (A.B.C.) 이 가능하다는 것과 사용자 임의대로 스팟과 평균측광 모드를 전환할 수 있다는 특지이 있었다.
1990년에 출시된 RTS III는 전문적인 사진가들이 꿈궈오던 대답이다. RTSIII는 최초로 필름실을 완전 진공으로 만들어 주는 Real Time Vacuum Back과 필름면의 수평유지를 위한 ceramic pressure plate를 장착했다. 처음으로 칼 자이스렌즈의 모든 역량이 필름에서 보여질 수 있게 된 것이다. RTS III의 또다른 첨단 기능은 Pre-Flash 스팟 측광 기능이다. 이 기능은 TTL 플래시 노출계가 어떤 플래시 장비와도 작동할 수 있게 한다. 더불어 초당 5장 연사의 내장 모터드라이브, 디옵터 조절기, 오토브라케팅, 다중노출, 1/8000의 셔터스피트, 1/250의 플래시 싱크 스피드를 지원한다.
Contax S2는 1992년 콘탁스 카메라의 60주년 기념모델로 소개되었다. 세계 최초의 35mm SLR카메라 였던 콘탁스 S에서 이름을 따왔다. S2는 상당히 사려깊은 카메라이다. 어떤 노출계 이외에 어떤 자동기능도 제공하지 않으면서도 사용자에게 어떤 카메라 보다도 안정감을 주는 모델이다. 뒤이어 바디 도장을 검은색으로 바꾼 S2b가 나왔다. S2b는 색깔 말고도 중앙부 중점 측광 기능을 추가하였다. S2와 콘탁스 ST도 발표되었다. ST는 RTSIII의 동생으로 불린다. 세라믹 압축 플레이트를 갖추었으며 저광량시에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은 일루미네이터가 내장되어 있다.
1993년, 야시카는 카메라 바디안에 디지털 포커스를 가능케 한 RX를 선보였다. RX는 뷰파인더 안에 디지털 포커스 수치를 보조적으로 보여줘서 더 정밀한 포커싱을 가능케 해준다. RX는 더불어 최초로 커스톰 펑션 기능을 도입하였다. 커스톰 펑션기능은 카메라 여러 기능들을 사용자 임의대로 순서화할 수 있는 기능이다.
콘탁스는 1994년 G1를 발표하면서 세계 카메라계의 중앙무대를 차지하였다. 티타늄 바디의 이 레인지 파인더 카메라는 견고함과 아름다움을 동시게 갖고 있었다. 풀 메뉴얼 기능을 지원하는 이 레인지 파인더 카메라는 오토 포커스 기능을 갖고 있어 라이카와는 다른 레인지 파인더 카메라의 새 장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