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놀타
伊丹의 용융로에 불이 들어간 날,
- 미놀타가 추구하여 온 광학렌즈용융으로부터 일괄생산, 그 뒤에 숨어있는 것은 이상적인 렌즈제작에 몰두하였던 창업자의 열의에 있었고, 그것이 지금의 G렌즈와 비구면렌즈의 기술로써 결실을 맺게 되었다. -
이상적인 렌즈를 만들기 위한 ……자가용융으로의 길
지금의 카메라 제조회사 중에서 렌즈용 광학유리를 자신의 회사에서 생산하고 있는 것은, 미놀타를 포함한, 단지 2개의 회사에 불과하다. 광학유리의 용융(溶融)은 상상외 큰 설비를 필요로 하며, 소량의 광학용 유리를 생산하는 것은, 가격면에서 결코 유리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혹시 지금부터 용융설비를 만들라고 하면, 그 투자의 방대함에 회사의 운명을 걸어야 할 정도의 커다란 결단을 필요로 할 것이다. 미놀타가 광학유리의 자가융용설비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회사의 광학유리로 렌즈의 생산을 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그 답을 얻기 위해서는,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28년 29세의 청년이 오사카의 센이마야거리에 [일독사진기상점]라는 간판을 걸었다. 이것이 미놀타의 창업자인 田嶋一雄의 카메라제작이라는 꿈의 출발점이었다. 당시의 일본에서는 정밀기계중 하나인 카메라를 제작하는 것이 생각 외로 어려운 일에 속하였다. 바디의 제작은 물론, 나사 하나까지 자신이 스스로 제작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일본의 공업생산능력으로는 아직 카메라의 제작을 위한 특수한 부품이 시장에 조달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다음해인 1929년에 田嶋는 카메라 제1호기인 [Nifcalette]를 완성하였다. 이것을 눈앞에 두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던 田嶋는 어느새인가 자신의 마음속에 중대한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그것은 스스로가 생산한 부품으로 카메라를 제작한다는 도전이었다. 1931년에는 먼저, 셔터를 생산하었다. 이 셔터는 [NifcaKlapp]라는 카메라에 탑재되었으며, 생산을 하자마자 동이날정도의 히트상품이 되었다. 그 해에 회사의 명칭을 몰더합자회사로 바꾸었다. 1933년에는 나중에 브랜드명이 될 [Minolta]가 등장하였고, 그 뒤를 이어, [Minolta Vest], [Minolta Six] 등이 계속하여 등장하였다. 1937년, 田嶋는 다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디었다. 염원의 렌즈가공전문공장이 완성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하여 회사의 명칭을 ,찌요다광학정공으로 고쳤다. 그 뒤배경에는 지금까지의 주류이었던 스프링카메라로부터, 당시 광학기술의 최첨단인 독일의 이안카메라가 주류가 되기 시작하였다는 속사정이 있었다. 미놀타에서는 일본 처음으로 이안카메라의 제작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 해 9월, 렌즈와 셔터를 일본산으로 한, 염원의 이안카메라 [Minolta Flex]를 발표하였다. 카메라의 판매량은 예상외로 호조를 보였으나, 청일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일본경제가 통제경제체제로 이전되게 되었고, 카메라 제작을 위한 재료도 생각과 같이 손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항거할 수 없는 군의 명령에 의하여, 미놀타는 광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포탄의 신관제조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로써 미놀타는 광학기업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느냐의 기로에 서게되었다. 이 어려움을 넘기 위하여, 田嶋는 군관계자들과 빈번하게 접촉하게 되었고, 조금만이라도 더 광학에 관계가 있는 제품을 수주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것은 창업자이고 사장인 田嶋의 광학기술에 대한 정렬, 그 자체였다......
일괄생산으로의 꿈 ……용융설비의 탄생
겨우 미놀타는 해군으로부터 휴대용 쌍안경의 제작을 수주받는데에 성공하였다. 타산적으로는 납품가격이 원가에도 못 비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코 장사가 된다고 볼 수는 없을 정도였다. 회사내부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으나, 田嶋는 이러한 목소리를 억누르고, 적자를 각오한 채로 생산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의 판단이 정확했는지의 여부가 밝혀진 것은 전쟁이 끝나고 난 뒤부터이다. 1942년 1월 찌요다광학정공은, 해군장관으로부터, 광학렌즈용융공장의 건설명령을 받았다. 찌요다광학정공의 기술력이 인정받을 것이었지만, 동시에 상당한 투자를 필요 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 때 田嶋는 [군의 요청이 아니고, 광학제품을 일괄생산하는 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을 하면서, 망설임 없이 용융공장의 건설을 진행하였다. 공장건설은 전황의 악화 속에서도 진척이 되어, 1944년 6월에 伊丹공장의 용융로에 불이 들어가게 되었다. 개설로부터 이단공장을 극심한 공습 중에서도 렌즈용융섬광이 새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하면서 작업을 진행하였다. 어려운 상태에서 시작한 광학유리의 용융이었지만, 결코 손쉽지는 않았다. 유리의 역사는 일선에 의하면, 기원전 70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정도로 오래전부터 제작되었기 때문에, 유리가 비교적 제작하기 쉬운 것으로 착각되고 있지만, 광학용유리의 제작이라고 하면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 된다. 광학유리용융의 어려움은 [유리는 살아있는 물건]이라는 표현에서 잘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유리는 규산과 소다, 석회, 붕산 등의 혼합물을 고온으로 녹인 뒤, 결정시키지 않고, 무리하게 고체화시키는 것으로서, 물질의 구조자체는 액체상태라는 특수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용융후의 내각조건이 조금이라도 틀리면 품질에는 커다란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광학유리의 경우에는 규소와 칼륨, 바륨 등의 여러 가지 원료를 수종류 이상, 계량, 혼합하여, 용융하여, 원하는 굴절률을 만들어 낸다. 원료입자의 크기, 조합시의 계량의 정도와 혼합방법, 용융방법, 냉각방법 등, 굴절률의 오차 및 불량품이 생겨나는 요소는 셀 수도 없이 많다. 그것들을 확실하게 컨트롤 할 수 없으면, 생각하는 그대로의 렌즈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시중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시작한 광학유리인 SK렌즈의 제작도 뜻대로 진행되고 있지는 않았다. SK렌즈는 바륨이 다량으로 들어간, 당시의 신기술로서, 종래의 광학렌즈와 비교할 때 커다란 굴절률을 가지고 있었다. 미놀타의 용융기술로 SK렌즈의 제작을 성공한 것은 패전직후였다. 미놀타의 기술개발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전쟁중, 코팅이 되어 있는 독일제 쌍안경이 입수되면서, 기술자들은 그 렌즈의 밝기에 충격을 받았다. 당시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코팅기술도, 패전후 1년정도 후에 실용화시켰다. 이것이 약 10년후에 [녹색의 로컬]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아크로매틱코팅(다층막)렌즈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6년에는 저분산고굴절률을 보이는 란탄렌즈의 용융성공으로, 렌즈의 역사에 커다란 변혁을 가지고 왔으며, 대구경렌즈시대의 막을 열었다. 이 것은 전시중 쌍안경의 제작 등을 통하여 축적된 미놀타의 광학기술의 성과였다.
최첨단기술에의 도전 ……용융의 실제
광학렌즈의 용융기술에는, 굼벵이와 같이 천천히 데이터와 경험의 축적이 필요하다. 현재 미놀타에서는 놀랍게도, AD(이상분산)렌즈를 포함하여 100종류이상의 렌즈를 생산하고 있다. 이것들은 굴절률이 각각의 렌즈의 설계치에 적합하도록, 검사기계의 한계치가 소수점이하 다섯자리까지 컨트롤된 광학렌즈이다. 스스로가 용융을 하고, 이로부터 일괄생산을 하여야만, 품질의 보증 및 유지가 가능한 광학렌즈라고 불릴 수 있다. 이상적인 렌즈의 제작을 생각하여도, 스스로 사용할 렌즈용 유리를 생산을 하지 않으면, 그 이상은 한 여름밤의 꿈에 불과할 것이다. 이 정도로 많은 수의 광학렌즈의 생산은, 1945년, 당시로부터 생각하면 꿈에 불과한 이야기 이었다. 실제로 렌즈의 제조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원료의 계량, 혼합(조합)으로부터 시작한다. 같은 재료라도, 조합의 비율에 의하여 굴절률이 다른 렌즈가 생겨나기 때문에, 그 계량에는 매우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100Kg의 재료의 오차는 50g, 즉 2000분의 1밖에 허용범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더구나, 플러스오차는 마이너스오차로 보정하여, 정도(精度)의 한계까지를 추구하고 있다. 혼합시간이 길어도, 짧아도 재료들의 비중이 틀리게 되어 분리되어 버리기 때문에, 최적의 시간으로 혼합되고 있다. 냉각방법도 1일에 55도를 식히는 서냉법(徐冷法)이 원칙이다. 기술자이며, 화학자이며, 스스로 [렌즈기술자]라고 부르는, 용융의 베테랑기술자는 자신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혼합시간도, 조합비율에 의한 굴절률도, 우리들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렌즈가 만들어질지는 용융 전부터 알 수가 있습니다. 확립된 원칙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여러 방향으로 응용이 가능한 상태입니다.] 이것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던 50년의 세월의 역사의 축적에 있는 것이다. 지금은 AD렌즈와 비구면렌즈라는 최첨단기술로 결실을 맺고 있다. 현재 각카메라회사가 필사적으로 제조방법을 비밀로 하고 있는 비구면렌즈는, 그 성형의 어려움으로부터 결정적으로 양산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미놀타에서는 붉게 용해되어 있는 상태의 유리를, 고도로 정밀한 금형을 사용하여 직접 비구면렌즈를 제작하는 가라스몰더형성법을 가장 먼저 개발하여, 양상화의 디딤돌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에 의하여 비용의 절감과 정도(精度)의 확보가 동시에 실현되었고, 이것은 먼저 콤팩트카메라용 줌렌즈에 실제로 사용되었다. 4군4장 구성으로 첫 번째 렌즈에 양면 비구면렌즈를 채용하여, 최상이라고 불려질 정도로 심플한 렌즈를 구성하였다. 현재는 노하우의 축적으로 보다 고도의 비구면렌즈의 제작에 도전중이고, 미놀타는 대구경비구면렌즈를 양산할 수 있는 유일한 회사이다. 다시 베테랑기술자의 말에 의하면, [비구면의 세계에서는, 종래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매우 작은 오차도, 더 적게, 절반으로 해야하는 등, 더욱 더 엄격한 정도(精度)가 요구되고 있다. 이 해결은 시간과의 경쟁이다. 얼마나 더 짧은 시간에 그 정도(精度)를 올리느냐가 우리들의 현황과제이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일은, 광학렌즈를 현재의 기술수준에 맞추어 설계하는 것이 아니고, 상품화되는 미래를 시점으로 하여 기술을 예측하여 설계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가라스몰더비구면렌즈는 앞으로의 주류가 될 것이라고 보여지지만, 스스로 용융할 설비가 없는 회사로서는 필연적으로 다른 회사의 기술에 의존하여야 할 것이다. 광학렌즈의 자가용융설비를 최대한으로 살리고 있는 미놀타는, 이상적인 렌즈제작의 길을 이미 먼저 걸어가고 있다.
새로운 렌즈제작에 대한 도전 ……감과 기술의 기계화
1955년을 끝날 무렵, 미놀타에 대학을 졸업한 어느 신입사원이 입사하였다. 렌즈가공현장의 시스템을 개혁해보고 싶다는 그에게 회사의 중역들과 공장장은 소속에 관계없이 3년정도 여러 가지의 연구를 진행시키면서, 외부의 눈으로 공장을 바라볼 수 있도록 특명을 내렸다. 이것이 가능하였던 것은 미놀타가 자유로운 사내 분위기를 중요시하는데 있었다. 그때까지의 미놀타에는 다양한 렌즈제작용기계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장인들의 손에 의존하는 부분이 많았다. 렌즈를 연마기에 붙착하기 위해서는, '아시야니'라는 송진계의 수지를 사용하였지만, 렌즈의 종류에 따라 강도를 조정하여야 했다. 또한, 연마기에 렌즈를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손가죽이 벗겨질 정도로, 확실히 누르면서 고정시켜야 하였고, 연마후의 렌즈의 세정시에도, 그 렌즈의 종류에 따라, 용제의 종류를 변경하여야 했다. 이러한 작업에는, 정해진 매뉴얼은 없었고, 모든 것이, 오랜 경험을 가지고 익혀진 장인의 감과 기술에 의존하고 있었다. 경험에 의하여 연마된 장인들의 기술은 탁월한 것이었이었다. [익숙해지면서, 손가락으로 렌즈의 곡률(曲率)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되었고, 아시야니의 반죽의 강도도 어느 정도가 적당한 것인가를 알게되었다]라고 숙련공들이 입을 맞추고 있다. 그들 중에는 아시야니를 씹어보고, 그 강도를 정확하게 측정해내는 이도 있을 정도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불량품이 되는 정밀함이 요구되는 광학렌즈를 손끝으로 만들어 낸, 그들의 장인 예술은 가히 신의 경지였다고 불릴 정도이었다. 당시, 렌즈가공의 세계에서 연마된 장인들이 공장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이 납득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신의 경지라고 불려도, 역시 인간이 작업하는 이상, 모든 렌즈가 규격화되었다고는 할 수가 없었다. 그 품질이 규격범위에 있는 것은 틀림없었지만, 좋은 것과 약간 떨어지는 것의 차이가 눈에 보일 정도로 분명하였다. 또한 장인들의 개인차도 너무 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렌즈의 개체간의 차이는 매니아의 입장에서는, 렌즈의 개성을 느낄 수 있어 환영을 받았지만, 회사로서는 결코 좋은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제대로 된 후계자를 키우는 것도, 회사로서는 걱정거리였다. 베테랑 장인은 자신의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하지 않았으므로, 신입사원들은 그 기술을 훔쳐서 배울 수밖에는 없었다.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효율도 안 좋았고, 품질의 안정과 양산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없었다. [그]가 미놀타에 온 것이 이러한 시대였다. 어떻게 하면, 품질이 좋은 렌즈를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을까, [그]가 생각해낸 것은 장인의 예술을 수치화 하는 것이었다. 가장 우수한 장인의 기술을 수치로 바꾸어, 그것을 기계에 입력하면, 높은 품질의 렌즈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장인의 기술을 가진 기계를 개발하여야 했다. 광학렌즈의 세계에서는 기계회사가 시판하고 있는 것을 개조하여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새로운 렌즈제작을 위해 새로운 설비를 도입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 기계의 설계로부터 다시 시작하여야 했다. 그리나 문제가 된 것은 그 것만이 아니었다. 그 기계에 맞는 공구도, 전부 스스로가 만들어 내어야 했다. 이러한 오랜 시행착오 끝에, [그]는 소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팀을 현장으로 내려보냈다. 그러나, 장인들의 세계에서는 경험이 없는 신참자들은 배척을 당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기술자들은 숙련공들로부터 차가운 시선을 받아가면서도 성과를 올렸고, 리세스가공이라는 현재의 기계화로의 길을 열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지금도 미놀타에서는 대학졸업자도 현장의 작업을 경험하는 회사풍조이 유지되고 있다. 가공담당의 어느 관리직의 말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고정도광학부품의 연마가공은 지금도 탁월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만, 어느 일정한 수준에 있으면, 우리 사원들은 대학졸업자이어도 일년정도 지나면, 현장에서 수년을 지낸 경험자와 같은 수준이 됩니다] 장인예술의 수치화는 새로운 미놀타의 막을 열었지만,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긴 여정을 필요로 하였다.
전통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 계승되는 장인예술
전후의 혼란기에 조금도 쇠퇴하지 않고 광학으로의 열정으로, 어려운 시기를 넘긴 사장 田嶋는, 1946년에는 스프링카메라 [Semi Minolta III]의 시험기를 완성시켰다. 이는 일본 최초로 렌즈에 코팅을 입힌 카메라였고, 미놀타 최초의 수출용 카메라가 되었다. 그 후에도 렌즈셔터와 포커루플렌카메라의 생산을 시작하여, [Minolta 35], [Minolta Memo]를 탄생시켰고, 더욱 더, 다시 한번 이안카메라의 개발에 힘을 쏟았다. 이것들은 주력 수출용 상품이 된, 개량형 [Minolta Flex II B]와, [Minolta Cord], [Minolta Autocord] 등 이었다. 이러한 미놀타의 활약은 전후 일본산업의 부흥에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田嶋의 소원은 단순히 회사의 발전에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전쟁중, 군수품으로 사용되었던 광학기술을 세계평화를 위한 사진문화의 주역으로서 활용되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田嶋는 개발에 아낌이 없는 투자를 하였다. 렌즈공장의 설립후, 렌즈의 연삭과 연마를 위한 멜틸접착제의 다이아몬드지석(砥石)을 도입하였고, 중심고정기계, 정밀연마용 최신식 커브제네레이터(구면생성기)등을 서독일로부터 수입하였다. 고도의 제작기계의 도입에 의하여, 렌즈의 생산량은 수십 배로부터, 수백 배로 대폭 증가하였다. 광학렌즈산업계에서는 '제1차기계혁명'이라고 불릴 정도의 커다란 사건이었다. 이렇한 투자는 1962년 기념될만한 커다란 사건으로 연결되었다. 미국 최초의 유인우주비행이었던 [프랜드쉽7호]에 [Minolta Hi-Matic]이 탑재되었던 것이었다. 이 것을 계기로 하여, 광학성능, 견고성, 조작성 등의 여러 조건들을 만족시킨 [우주카메라]라는 미놀타의 명성이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이 때의 우주비행사는 1998년 10월, 77세의 사상최고령으로 36년 만에 우주비행에 성공한, 화제의 죤그렌상원의원이다. 제2차 기계화는 품질의 안정만이 아니고, 고성능의 렌즈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가격하락으로 이어졌다. 이 제2차기계화가 시작된 1965년에는, 당시의 사원의 초봉으로는 교환렌즈 하나만을 사는 것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사실과, 현재의 렌즈가격을 비교하면, 가격면에서도 기계화가 얼마나 큰 역할이 했는지 잘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일반서민들이 쉬게 구할 수 있게 된 렌즈는 새로운 사진문화를 발전시켜나갔다. 사용자의 요구에 부응하면서도,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미놀타는 여러 가지의 렌즈를 개발하고 있다. 대각선어안렌즈와 원상어안의 콤팩트한 어안렌즈, 소프트의 정도의 변경할 수 있는 바리소프트, 고층건축물 등의 촬영시에 생기는 왜곡을 시정해주는 시프트, 대형카메라의 아오리효과를 가미시킨 시프트CA, 들고 촬영하는 것이 가능한 반사망원 500mm등, 미놀타의 독자적인 사상이 반영되어, 촬영영역의 확대에 공헌한 렌즈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도 생산기술의 기계화가 없이는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였을것이다. 이렇게 되면, 신의 경지의 장인예술이 모두 기계에 입력이 되어, 없어져 갈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미놀타렌즈가 사진문화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킴과 동시에 렌즈의 세계는 점점 다양화되어가고 있어, 미놀타가 자랑하는 비구면렌즈의 기술을 비롯하여, 신소재의 AD렌즈 등, 새로운 숙제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이 새로운 숙제들이 등장할 때마다, 다시 신의 경지의 장인예술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AD렌즈는 매우 연약하며, 불에 약하기 때문에, 대구경렌즈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시야니와 본드멜드제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연마를 위하여 직접적인 방법을 개발하여야 했으며, 세정한 렌즈를 닦아내기 위해서도 특수한 기술이 요구되었다. 또한 렌즈의 크기, 형태에 따라서 아직도 과거의 연마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현재에도 옛날의 기계과 기술이 그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유리라는 자연소재를 사용한 렌즈의 세계는 최첨단 하이테크산업이면서도, 전통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있다. 수치화된 최첨단의 시스템과 함께, 미놀타의 현장에서는 아직도 고도로 숙련된 장인의 기술이 살이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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